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집)

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집)

김승옥

민음사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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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문장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 인상 깊은 구절

p. 5

광주에서 기차를 내려 버스를 갈아탄 이래, 나는 그들이 시골 사람들답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점잔 빼면서 얘기하는 것을 반수면 상태속에서 듣고 있었다.

p. 6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p. 6

6월의 바람이 나를 반수면 상태로 끌어넣었기 때문에 나는 힘을 주고 있을 수가 없었다.

p. 15

"행복하시죠? 돈이 많고 예쁜 부인이 있고 귀여운 아이들이 있고 그러면......"

p. 17

비가 나를 굉장한 효자로 만들어 주었다.

📝 감상문

첫 줄의 의미: 서울과 대비되는 고향으로 향하는 이정표, 그리고 잡초의 모습에서 아무렇게나 방치된 자기 자신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무진기행》은 1964년 소설가 김승옥이 23세의 나이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김승옥의 대표작이자 한국 문학계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손꼽힌다. 작품은 무능하고 무기력한 현대인을 상징하는 주인공 윤희중이 무진에서 보낸 2박 3일간의 여정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은 '대립과 화해'를 주된 축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 대립 구도를 단서로 삼아 소설을 깊이 있게 독파해보고자 한다.

무진 vs 서울

무진은 주인공 윤희중의 고향이다. 자욱한 안개가 명산물이며, 해안과 맞닿아 있는 가상의 공간이다. 젊은 시절 주인공은 친구들이 전선으로 나갈 때, 어머니의 등쌀에 밀려 골방 신세를 져야 했다. 그런 점에서 무진은 그에게 '패배의 공간'이기도 하다. 작품 속 여러 인물이 묘사하듯 이 소설은 상황과 배경 묘사가 남다른데, 무진은 특유의 무채색 분위기를 풍기는 지루하고 심심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무진은 주인공이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혹은 새로운 출발이 필요할 때 찾는 도피처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곳에서 그는 새로운 사랑인 하인숙을 만난다.

반면 서울은 윤희중의 현실적인 삶의 터전이다. 아내가 있는 곳이자, 제약회사 전무라는 번듯한 사회적 지위가 보장된 공간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늘 서울에서 탈출하기를 갈망한다. 결국 서울을 떠나 무진으로 오지만,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던 중 "복귀하라"는 아내의 전보를 받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윤희중의 육신이 무진을 고향으로, 서울을 거처로 삼고 있을지언정, 그의 정신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하인숙과 정분을 나누면서도 방황하고, 서울에서의 삶에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듯, 두 공간 모두 주인공에게는 본질적인 방황의 공간인 셈이다.

아내 vs 하인숙

아내는 과부 출신이고 하인숙은 처녀이다. (작중 방파제 집에서 윤희중이 속으로 '처녀는 아니었다'라고 생각한 대목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기보다 일종의 비유라고 생각한다.) 아내가 물질과 세속을 상징한다면, 하인숙은 정신과 순수를 상징한다.

  1. 아내와 관련된 키워드는 제약회사 전무, 돈, 그리고 일방적인 '전보와 명령'이다.
  2. 하인숙과 관련된 키워드는 진정한 사랑, 방황, 그리고 쌍방향의 '편지와 소통(질문)'이다.

아내는 전보를 통해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하인숙은 대화와 질문을 통해 주인공과 교감한다. 아내는 작중 그 어떤 인물보다 철저하게 이름이 감춰지는 반면, 하인숙은 다른 인물들과 달리 이름이 명확히 밝혀진다. 이를 통해 주인공 윤희중이 세속적인 아내보다 하인숙에게 더 깊이 마음을 주고 있었음을 비유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름이란 곧 존재의 의미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편지 vs 전보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전보는 단방향 소통의 매체다. 아내는 전보를 통해 "27일 회의 참석 필요. 급상경 바람"이라며 명령조로 일관한다. 반면 편지는 쌍방향 소통을 뜻한다. 윤희중은 서울로 가고 싶어 하는 하인숙에게 편지를 쓰지만, 이내 부끄러움을 느끼고 이를 찢어버린다.

나는 오히려 편지를 찢는 행위야말로 주인공의 결단을 암시한다고 보았다. 윤희중은 전쟁통에서도, 사랑 앞에서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 채 방황하던 인물이다. 심지어 “방문받았다”, “나는 먼저 온 손님들에게 소개되었다”와 같은 피동형 표현들에서도 그의 수동적인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런 그가 편지를 찢었다는 것은 마침내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확고한 선택을 내렸음을 의미한다. 비록 부끄러운 현실일지라도 기꺼이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택한 것이며, 방황을 끝내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결론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고등학교 시절 처음 접한 이후, 대학교 발표를 위해 다시 읽었고, 오늘 문득 생각이 나 또 한 번 펼쳐 들었다. 고등학교 때는 단순한 '농촌과 도시의 대립'으로 읽혔고, 대학교 때는 '하인숙과 아내의 이름이 지닌 상징성'에 주목했다면, 지금의 나는 이 소설을 '방황과 결정'이라는 키워드로 읽어냈다.

소설은 뚜렷한 대립 구도를 취하고 있지만, 세월에 따라 그 대립 요소를 이토록 다양하게 변주하며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괜히 한국 현대소설의 모델이라는 찬사를 받는 게 아님을 새삼 실감한다.

부록

  1. 윤희중이 어머니의 묘를 참배하며 했던 “비는 나를 효자로 만들어 주었다”라는 말의 뜻을 전에는 잘 몰랐다. 알고 보니 슬픈 눈물이 흐르지 않는 주인공의 뺨 위로 비가 대신 흘러내려, 마치 눈물을 흘리는 효자처럼 보이게 만들어 준 상황을 역설적으로 묘사한 것이었다.
  2. 이 소설을 읽을 때면 묘하게도 김광석의 〈먼지가 되어〉라는 노래가 머릿속을 맴돈다.